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9-11-08 16:19:47
기사수정


▲ ‘안성맞춤 랜드’에 가서 공예 단지로 넘어가는 능선 중턱에 ‘안성맞춤인 동상(사진)’이 세워져 있다.


[기고 = 정병호 안성 시문학회 회장] 사전(事典)에서 ‘안성맞춤’이란 단어를 검색해 보면 ‘요구하거나 생각한 대로 잘된 물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이어 ‘경기도 안성에서 유기(鍮器)를 주문하여 만든 것처럼, 잘 들어맞는다는 데서 유래했다.’라고 쓰여있다.

 

그러니까 ‘안성맞춤’이란 말을 풀어쓰면 안성에서 유기그릇을 주문하여 받아보니 흡족하게 맘에 들었다, 라는 말이, 모든 상황에 대입되어 무엇이든지 요구하거나 생각한 대로 딱 들어맞았을 경우 ‘안성맞춤’이란 말을 스스럼없이 쓰고 있다.

 

유기(鍮器)는 구리와 주석의 합금으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전통 고급 그릇을 말한다. 크게 주물 유기와 방짜유기로 나누어진다. 주물유기는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찍어내는 방식이고, 방짜유기는 78% 구리와 22% 주석을 합금한 우리나라 고유의 금속기법이다.

 

▲ 유기제작과정

합금 된 놋쇠를 불에 달구어 망치질을 되풀이한 뒤 얇게 늘여가며 형태를 잡아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휘거나 잘 깨지지 않고 색이 변하지 않으며, 사용할수록 윤기가 난다. 광도가 선명하고 보온성이 뛰어나 제사 용구와 식기로 주로 사용되었으며 타악기 제작에도 이용되었다. 색상이 금과 가깝고 은은한 광택으로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첨단의 시대를 사는 지금도 묵묵히 안성 유기의 명맥을 이어가시는 장인(匠人)이 계시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안성맞춤’이란 말이 우연히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말이었을까? 아주 천천히 그리고 깊게 생각해보자.

 

안성과 이웃 사이인 이천(利川)과 여주에는 예로부터 도자기가 유명했다. 유명한 도자기는 지역 특산품으로 궁궐로 납품되었다. 도자기는 흙으로 빚어 가마에 구워낸다. 그 흙은 주변에 흔하다. 그러나 유기(鍮器)는 구리가 원재료(原材料)이다. 그 구리가 돌멩이처럼 흔하게 굴러다닌 걸 주위에서 본 적이 있는가? 안성에 구리광산이 있었다고 들어보셨는가? 그렇게 따져보면 ‘안성맞춤’의 기원(紀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안성맞춤 박물관’에 가면 안성 유기의 역사를 청동기 시대로 끌고 올라간다. 그러나 그 역사를 증명하기 위한 청동기 유물은 안성지역에서 출토되지 않고 있다. 역사를 삼국시대쯤으로 한번 되돌려 보자.

 

▲ 안성맞춤 박물관

안성이 처음엔 백제 땅이었다가, 고구려의 남하(南下) 정책으로 고구려 땅이 되었다가, 통일신라 시대가 되면서 신라 땅이 되었다. 삼국시대 지도를 그려보면 국경의 변방쯤에 안성이 자리 잡고 있다.

 

어느 날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찾아와 백제 땅이라고 세금을 걷어갔다. 날벼락처럼 고구려 사람들이 쳐들어와 조금이라도 쓸만한 것들은 약탈해 갔다. 그들이 물러가자 신라인들이 나타나 주인행세를 했다. 그때의 안성은 백제나, 고구려나, 신라로부터 버림을 받은 땅이었다. 버림받은 땅엔, 버림받은 사람들이 찾아와 둥지를 틀었다.

 

우리나라는 신석기 때부터 벼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김제(金堤)에 가면 벽골제란 아주 오래된 저수지가 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저수지라고 한다. 백제나 신라나 고구려까지, 한반도에 나타난 국가들의 기본 틀은 농업(農業)이었다.

 

자기 땅에 씨뿌리고 가꾸며 거두어들인 그들이 이 땅의 주인이었다. 처음엔 안성도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름 없이 버림받은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버림받은 땅밖에는 없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는 정확하게 역사적인 고찰(考察)로 증명된 것은 없다. 그저 그러리라 추측할 뿐이다. 쇠를 불에 달궈 연장을 만들고, 가축을 잡아 살(肉)과 뼈(骨)를 나누며, 그 가죽으로 옷이나 공예품을 만들어 장식하고, 곡예 하듯 밧줄을 걸쳐두고 휘휘 춤사위를 뽐냈던 사람들이다.

 

궁예와 더불어 도적으로 살았고,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56억 7000만 년(年) 이후에나 오시겠다던 미륵(彌勒)으로 자신의 고단한 삶을 위안으로 삼았던 그들, 농사를 지을 줄 몰랐던 낯선 이방인. 오랫동안 이름 없이 불린 자(子). 목숨에서 목숨으로 이어져 내려온 명맥(命脈).

 

그들이 처음부터 유기를 만들었을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유기가 필요했던 때가 있었고, 그것이 번창하던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이 조선(朝鮮) 시대였다. 유교(儒敎)가 성리학(性理學)으로 품격이 높아지며 국가를 지탱하는 질서로 자리 잡았다.

 

그 중심은 효(孝)였으며, 돌아가신 부모님을 향한 위엄있는 제사(祭祀)로 자신의 효행(孝行)을 증명할 필요가 생겼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화려한 제기(祭器)가 필요했다. 목기(木器)나 도자기로서는 번쩍번쩍 광택이 화려한 안성의 유기(鍮器)를 따라갈 수가 없다.

 

▲ 안성맞춤 박물관내부에 전시된 유기

유교가 번창하고 굳건할수록 제기(祭器)로 유기를 쓰지 않으면 불효자처럼 인식되던 때가 조선 시대였다. 그때, 가는 숨결처럼 명맥으로 이어져 내려온 기술이 화려하게 꽃피웠다. 수요가 많아질수록 유기를 제작하는 공방이 늘어갔을 것이다.

 

그 집집들이 모여서 유기전(鍮器廛)을 형성했다, 거기에 농경사회(農耕社會)에선 쉽게 먹을 수 없었던 고기로 먹거리를 채웠고, 각종 공예품으로 다양성을 더했으며, 줄타기 놀이로 볼거리를 더했다. 안성은 조선의 3대 시장(市場)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 시작은 이렇게 시작되지 않았을까?

 

그들이 처음 이 땅에 발붙였을 때, 그들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궁예와 어울렸을 때는 도적 떼로 불렸다. 조선 시대 궁궐의 제기로 유기가 납품되었을 때 그걸 만든 장인(匠人)이 박(朴)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고 밖에는 기록된 게 없다.

 

유기전(鍮器廛)이 형성될 정도라면 아주 큰 국가적 공업단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3대 시장이었다고 한다면, 안성은 조선에서 가장 큰 상공업(商工業) 도시였다. 그들의 기술과 그들의 노력으로 안성이 화려하게 꽃피웠지만, 그때도 그들의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 없다.

 

사농공상(士農工商)으로 수직(垂直)화된 사회에선 이름으로 불릴 사람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면면히 이어져 왔지만, 그들에게 이름이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안성맞춤 랜드’에 가서 공예 단지로 넘어가는 능선 중턱에 ‘안성맞춤인 동상’이 세워져 있다. 입구에 크고 화려하게 서 있는 바우덕이 동상과 비교해도 작고 초라하다. 어떤 고증을 거쳐 제작되었는지는 몰라도 유기를 만드는 장인(匠人)과 그 유기를 전국으로 내다 판 상인(商人)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이 지금,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작금에 와서도 우리가 그들을 부르는 이름이다. 통찰(洞察)되지 않은 안목(眼目)으로 그들을 보고, 통찰되지 않는 사고(思考)로 그 존재 의미가 무시되어지고 있다.

 

그러면서 화려한 안성의 문화와 역사를 말하고 있다. 숭고하고 전통적인 가치(價値)를 얘기하면서도 정작 그들이 누구였는가를 말하는 사람이 없다.

 

아직도 당연하게 그들에겐 이름이 없어야 한다는 지배자(支配者)적 존재의식이 우리에게 남아있다. 아니라고 부정해도 그 증거가 이름 없이 남겨진 작고 초라한 동상이 말하고 있다.

 

▲ 남사당 칠무동상

▲ 바우덕이의 동상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건 관심과 사랑일 것이다. 광대의 꼭두쇠였던 암덕이를 바우덕이로 불렀다. 지금 현재, 안성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지 않은가.

 

꾸준하고 관심 있게 우리가 불렀기 때문에, 지금도 맞춤랜드에 우뚝 선 안성의 표상(標相)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이름이 없다고 부르지 않은 ‘안성맞춤’이란 이름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가?

 

누군가에게 그 이름을 뺏겨 안성에서도 ‘안성맞춤’이라고 쓰지 못하고 ‘안성마춤’이라고 쓰고 있는 이 슬픈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생각해보자. 무엇이든지 요구하거나 생각한 대로 딱 들어맞았을 경우 우리는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쓰고 있다. 만족한 대로 딱 들어맞아 ‘안성맞춤이 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목숨이 불꽃처럼 사라져 가신지 아시는가?

 

그 소중한 이름을 일제 강점기도 아닌데 황망하게 빼앗긴 어리석음은 누구의 잘못으로 돌려야 할까.

 

’안성맞춤‘은 안성의 자랑스러운 이름이다. 그 이름을 다시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은 무엇일까? 피켓을 들고, 머리띠를 동여매고 길거리로 뛰쳐나가는 길이 올바른 방법일까? 아닐 것이다.

 

그건 결코 아닐 것이다. 관심 있게 꾸준히, 우리가 우리를 불러주는 이름.

’안성맞춤‘

우리가 불러야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이름.

’안성맞춤‘

 

정병호 안성 시문학회 회장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해주세요.

http://wrtimes.co.kr/news/view.php?idx=11720
기자프로필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김학용후보 배너
윤종군후보 배너
0.안성시 불공정 하도급 신고센터운영
'고향사랑 기부제'
안성 하우스토리 퍼스트시티
한경국립대학교
만복식당
설경철 주산 암산
넥스트팬지아
산책길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