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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11-09 08: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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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상호 작가

[송상호의 재미로 보는 안성이야기] 바로 앞장에서 말한 나의 명언을 놓친 사람을 위해서 한 번 더 하면 이렇다. “이기적인 배타성은 텃새를 부리지만, 정의로운 배타성은 불의에 저항한다”. 왜 또 하느냐고? 밑줄 안친 분들은 밑줄 치라고. 사실은 이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그 저항의 역사로 달려가기 위해서다. 그 서막이 안성역 이야기다.

 

“아! ‘뻘짓’ 제대로 해서 우리만 개고생이네”

 

안성이 평택의 부속도시도 아닌데, 가끔씩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평택엔 세무서가 있지만, 안성엔 ‘평택세무서 안성민원실(봉산로터리)’이 있다. 법원도 안성엔 없어서 평택을 가야한다.

 

하다못해 삼성카메라 AS센터도 안성에 없어 평택을 가야한다. 2019년 현재 안성에선 바로 기차를 탈 방법이 없다. 평택을 가야 기차도 탈 수 있고, 전철도 탈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당신도 할 말이 많을 게 분명하다.

 

왜, 언제부터 평택과의 사이에서 이런 일이 있었을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지만, 이 일이 결정적인 듯싶다. 바로 평택역과 안성역이 그것이다.

 

실제로 그랬다. 경부선 철도가 처음에는 안성을 통과하는 노선이었는데, 안성유지를 비롯한 군민들의 반대로 평택을 통과하는 노선으로 변경되었다고 한다. 평택역이 1905년 1월에 최초로 개설됐으니, 1905년 이전에 안성사람들의 ‘경부선 안성 유치 반대’가 극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선택 후 100년이 지난 지금, “아! ‘뻘짓’ 제대로 해서 우리만 개고생이네”라 할 만하다. 이것은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안성의 배타성의 산물이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안성이 발전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한 면으로만 보면 그건 사실이다.

 

100년 전 안성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그런데 한 면이라니? 다른 면도 있다는 건가. 100년 전 안성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 이유를 자치안성신문 봉원학기자가 그의 기사 <다시 찾은 우리동네 우리마을[339] : 안성시 석정동>(2017.3.5.)편에서 탁월하게 설명해냈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그 기사를 참고했다.

 

기사에 따르면, 경부선 안성역이 들어서지 못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그 하나가 바로 안성의 상권을 살리기 위해서였다. 뭐라고? 아니 말이 되냐. 안성의 상권을 살리려면 당연히 경부선을 선택했어야지. 그래 그 말이 맞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고, 지금의 시각으로만 본 것이다. 그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4장(안성맞춤 도대체 뭘 맞춘 거지)과 8장(서울과의 애매한 거리 때문에 안성장이 유명하다고?) 등에서 안성장의 조선시대 위상을 보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삼남과 서울을 잇는 교통요지 교통수단은 기차가 아니라 말과 사람이었다.

 

몇 백 년을 그래왔다. 당시 안성사람들은 기차역이 가져다줄 후폭풍에 대해서 겪어본 바가 없었다. 기차역이 안성에 굳이 들어오지 않아도 안성장은 계속 잘 될 걸로 판단한 듯하다.

 

한 개인의 변화도 쉽지 않은데, 한 사회의 변화가 그리 쉬운가. 더군다나 한참 잘나가고 있는데, 변화가 온다면 더욱 그러하다.

 

경부선을 반대한 안성사람들의 진짜 이유.

 

이와 같은 첫째 이유보다 사실 둘째 이유가 역사적으로 더 중요하다. 경부선이 생긴 1905년 대한제국은 서서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일본이 주체가 되어 만든 경부선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굳히고 경제적 수탈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을 간파한 안성사람들은 필사적으로 경부선 유치를 반대했다. 임진왜란 때도, 당시에도 일본침략에 맞서 목숨 걸고 의병활동을 하던(뒷장에 가서 그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안성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경부선이 개통되고 정확하게 5년 뒤인 1910년에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스러운 역사가 일어났다. 일본에게 통째로 나라가 넘어가버렸다.

 

“아, 그래서 안성역이 생긴 거구나”

 

하지만, 어떤 선택이든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경부선은 안성의 상권과 안성사람들의 맘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이대로 가만히 당할 수만 없다는 위기의식이 싹텄다. 안성장의 부활을 꿈꾸며 안성철도역 설립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25년 11월1일에 경기선이 개설되었다.

 

첨엔 천안과 안성을 연결했고, 이어 1927년 4월에는 죽산, 1927년 9월엔 장호원까지 경기선이 이어졌다. 1956년에 경기선을 안성선이라고 이름을 바꿨다. 1967년 8월 1일엔 통일호 운행을 끝내고, 천안과 안성사이에 비둘기호를 운행했다. 1972년에는 철도 이용객이 178,533명이었다니, 한참 잘 나갔다. 1985년 4월 1일엔 사람과 화물운송을 중단하고, 1989년 1월 1일에 안성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일본상권으로부터 안성상권을 지키려는 필사적인 노력.

 

1925년에 안성역이 처음 생길 때는 탈도 많았다. 안성의 필요에 의해 역을 추진했지만, 일본의 속내(경제수탈)를 안성사람들이 모를 리 없었다. 안성역 주변에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면, 일본상인의 배만 불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이때 안성사람들 특유의 배타성을 발휘했다. 안성역 주변의 토지를 확보해 일본상인이 발을 못 붙이게 했다. 이를 위해 자진해서 땅을 기부하기도 했다. 안성역과 떨어진 구시가지엔 장사 환경을 개선해서 손님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 1926년 7월에 발간한 국내의 신문들에 의하면, 안성역 주변에 안성사람의 점포가 120여 개, 일본사람의 점포가 6개, 중국인 점포가 9개라고 보도하고 있다. 안성사람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

 

안성역이 내혜홀 광장자리에 있었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게 하나 있다. 안성역은 과연 어디에 있었나. 현재의 내혜홀 광장자리다. 안성역 자리에 내혜홀광장이 생긴 게 우연일까.

 

우린 1장(왜 내혜홀 광장이라 했을까)을 통해서 내혜홀이란 이름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가만히 있는 안성을 백제와 고구려와 신라가 차례로 차지한 아픔의 역사를 보았다. 외세에 대한 정의로운 배타성이 싹튼 시기였다.

 

2019년 일본의 경제보복이 있는 지금, 안성은 정의로운 배타성을 멈출 수 없게 되었다. 안성의 저항의 역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잠깐! 멋있는(?)이야기는 접어두고, 1905년 경부선 철도를 거부한 안성사람들의 행동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잘한 건가? 못한 건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젠 안성을 살아가는 나와 당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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