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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11-16 08: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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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회에 걸쳐 연재되는 <재미로 보는 안성이야기>는 2019년 9월에 출간되어 3쇄를 찍은 작가 송상호의 책이다. 그가 안성사람들의 자긍심과 안성의 미래를 위해 쓴 책 <재미로 보는 안성이야기> 총 30편의 이야기를 매주 1편씩 안성독자들과 나누고자 한다. 이 책은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읽도록 만들어졌으며, 안성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내용으로 가득하다.[편집자 주]

 

▲ 송상호 작가

[송상호의 재미로 보는 안성이야기] 일본에 대한 안성의 저항의 역사는 소소한 것부터 큰 것 까지 다양하다. 그 중에서 전투를 통한 저항의 역사는 크게 두 시기다.

 

임진왜란과 근대 일제침략기가 바로 그것이다. 두 시기에 공통적으로 나타난 운동이 바로 의병운동이다. 의병운동은 어쩌면 가장 안성다운 운동이리라. 중앙정부군이 아닌 지방 민중들이 일으킨 운동이니까 말이다.

 

왜적이 두려워한 홍장군 일가도 안성사람들의 작품.

 

임진왜란 당시 역사에 오른 3명의 안성 의병장은 홍자수, 홍계남 그리고 이덕남이다. 이덕남은 서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외삼촌 홍자수 밑에서 자라났다. 홍자수는 홍계남의 아버지이고, 이덕남은 홍계남과 사촌지간이다.

 

홍자수 장군은 홍계남을 비롯한 아들 5형제(안성의 독수리 5형제인가)와 조카 이덕남과 함께 안성에서 의병을 조직했다. 진천 엽둔 고개에서 왜적을 물리쳐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의병들이 그에게 모여들어 3천 명에 이르는 대군이 되었다.

 

특히 홍계남 장군은 안성 목촌(현재 미양면)에 성루를 쌓고 왜적을 크게 무찔렀다. 이 공을 인정해서 선조임금이 홍계남을 수원판관으로 임명했다. 아들의 부임을 보지 못하고 아버지 홍자수 장군은 왜적의 기습으로 죽산에서 전사했다.

 

이에 아들은 혼자서 수십 명의 왜적을 물리치고 아버지 홍자수 장군의 시신을 찾아오기도 했다. 당시 왜적들 사이에선 ‘홍장군’이란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고 한다.

 

이덕남 장군은 무기가 없어 농기구를 녹여서 무기로 만들어 왜군과 교전하였다. 그 뒤 서울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사촌 홍계남 장군과 함께 왜군과 교전했다. 외삼촌 홍자수 장군과 엽둔 고개에서 왜군을 대파했다. 이후 경기·충청 지방의 의병들과 합세하여 싸우다가 서운산성에서 왜적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이 세 사람의 무덤 또는 고루비가 모두 미양면에 있다. 홍자수 장군 묘는 미양면 갈전리 산 18-10에, 이덕남 장군 묘는 미양면 구수리 산85-1에, 홍계남 장군 고루비(장군의 의병활동을 기리는 비석)는 미양면 구수리 산 87-1에 있다.

 

사실 이 세 명의 의병운동은, 안성 민중들의 지속적인 의병지원이 없었다면, 시작도 하지 못했다.


3차 의병운동에 안성사람들도 적극 참여해

 

이로부터 300년이 지나 왜군은 일본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을 다시 침략했다. 이때도 안성사람들의 의병운동은 전국 의병들과 연합하여 세 차례나 이루어졌다.

 

1차 의병운동은 1895~1896년에 일어났다. 안성지역의 의병운동은 1895년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발생하자 안성에서 민승천에 의해 의병이 조직되었다. 민승천은 김하락이 이끄는 이천의병과 합세하여 광현전투와 이현전투에 참여했다.

 

2차 의병(1905~1907)운동의 안성시작은 1905년 4월이었다. 죽산에서 이인응이 포군과 농민 23명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양성·양지·용인을 거쳐 수원으로 진격하였다.

 

5월초에는 박석여가 부하 280명을 규합하여 죽산·안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박석여는 3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5월 21일에 죽산 원일면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3차 의병운동은 1907년 고종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해산이 계기가 되었다. 안성과 죽산을 본거지로 하는 의병부대는 1907년에만 40여 차례 가까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서용범과 임옥여는 죽산에서 900여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수원, 양지, 당진, 연천, 서산 등으로 의병운동을 넓혀나갔다. 또 안성에서는 200여명의 의병이 일본군과 2차례 교전하고, 파출소와 일본인을 습격하는 등 거센 항일운동이 이루어졌다.

 

녹두꽃은 또 피어난다.

 

이러한 안성사람들의 저항운동을 잘 설명해준 사람이 바로 한양대 성주현 교수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역사문화원 대표이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참여자조사위원이다. 그는 <동학과 동학혁명의 재인식>(2010), <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까>(2012), <일제하 민족운동 시선의 확대>(2014) 등의 저서를 썼다.

 

그는 2006년 2월 27일 안성 3.1운동 기념관에서 열린 ‘안성지역 3.1운동의 특성과 역사적 의의’를 주제로 가진 학술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1890년 관아를 습격한 민란이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반봉건의식이 확대되었으며, 동학혁명 때는 죽산 지역의 동학군이 활발하게 움직여 관군도 진압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안성지역 동학혁명의 저항의식은 의병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일제강점이후에는 항일저항의식으로 이어져 3.1운동으로 표출되었다(2006.3.8 자치안성신문 황형규기자 기사문 재인용)”.

 

2019년 7월 13일에 종영한 SBS드라마 <녹두꽃>의 제목이 왜 녹두장군이 아닌 녹두꽃이었을까. 이 드라마의 신경수 감독과 지금 이 책의 송상호 작가는 말하고자 하는 바가 통하기 때문일 거다.

 

녹두장군도 의병장군도 수많은 녹두꽃들이 있어서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 말이다. 안성에 희망이 있다면, 바로 이 녹두꽃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저자 송상호는 안성에 이사 온 지 20년차다. 2001년 일죽에서 ‘더아모의집(더불어 사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모임의집)’을 열었으나, 텃새로 인해 보금자리에서 세 번 쫓겨나는 아픔을 겪었다. 2005년부터 안성신문 등 각종 신문에 기자로 활동했고, 지금은 금광면 양지편마을에서 마을주민과 어울려 살면서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19금을 금하라> 유심 | 2018.10.19, <더불어 바이러스> 유심 | 2017.01.18, <그래도 종교가 희망이다> 유심 | 2016.05.31, <모든 종교는 구라다> 개정판, 유심 | 2015.08.31, <당신의 결혼은 안녕하십니까> 유심 | 2015.08.31, <자녀 독립 만세> 삼인 | 2013.03.19, <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 겨> 자리 | 2012.05.07, <우리 아이 절대 교회 보내지 마라> 자리 | 2011.07.20, <예수의 콤플렉스> 삼인 | 2011.06.30., <학교시대는 끝났다> 신인문사 | 2010.07.26, <모든 종교는 구라다> 자리 | 2009.06.30, <문명 패러독스> 인물과사상사 | 2008.12.26 등 총 11권의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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