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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1-11-29 11: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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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고

 

▲ 박용진 시인/평론가

[특별기고=박용진 시인/평론가] 철학을 한다는 것은 사유와 담론을 통해 지식의 자기 현실화를 취하려는 본능의 행위이다.

 

생의 수많은 경험들 사이에서 의도하지 않게 시행착오와 오류를 반복하면서 사람들은 늘 갈증을 느끼게 되고 이러한 진리에의 갈구가 철학적 삶을 살게 하는 바탕이 된다.

 

철학적 사유를 한다는 것은 한 단계 높아진 영혼에의 나침반을 작동시켜 명확한 길을 찾는 길잡이라 할 수 있다.

 

저자인 에릭 와이너는 뉴욕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칼럼니스트다. 그의 여러 저서에서 대중적인 철학 에세이로 많은 사람들을 철학적인 삶으로 이끌게 한다.

 

사실 사람들은 누구나 철학자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단지 논리 정연하게 형식화함에 철학자들과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떠한 내적 갈등과 외부 자극으로부터 대응방식을 전수받고 체계적 형식에 가까운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대화를 해보면 정답에 이르는 과정이 다른 점은 인식함과 주변 환경, 각각의 체질에서의 차이가 있지만 도달한 결론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다.

 

철학 관련 서적들은 읽기에 난해한 텍스트가 많지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진리에 도달하는 위대한 철학 사상가들의 생각을 쉽게 엿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읽으며 몇몇 철학자들의 인상 깊은 사상의 프레임을 다시 읊어 본다.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인간의 삶은 욕망 충족을 위한 의지의 연속이다. 의지는 의도와는 다르게 대상 앞에서 멈추게 될 때가 있으며 이로 인한 필연적인 고통이 발생하기도 한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나면 우리의 삶은 행복해지는 것일까.

 

어릴 적 불우한 가정환경 탓인지 쇼펜하우어는 여자를 경멸하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던 염세주의 철학자였다. 많은 논리에서 그는 암울을 얘기했는데 그럼에도 쇼펜하우어가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쇼펜하우어는 "의지의 욕망은 끝이 없으며 요구는 고갈될 줄 모른다. 모든 욕망이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했다.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본능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물의 기본 본능이다. 살기 위해 밥을 먹고 일을 하고, 하지만 이러한 생존 본능에 기인한 의지를 넘어 욕망이 될 때 우리는 고통받게 된다. 의지란 선택이나 행위의 결정에 대한 내적이고 개인적인 역량으로서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다.

 

본능에 기초한 마음이 중단될 때 결절의 마음은 충족을 위한 수단이 생겨나고 자칫 타인의 감정과 권리를 무시하는 나르시시스트가 되기 쉽다.

 

쇼펜하우어는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하기 쉬워짐을 경고했다. 정보를 통찰로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소음을 넘어서는 음악을 들으라고 했다. 음악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음악의 세계는 방대하다. 장르와 연주하는 악기가 많은 만큼 음악이 인간에 주는 긍정적인 효과를 진리에 이르는 수많은 말이라고 쇼펜하우어는 얘기했다.

 

그것도 서로를 견딜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금욕적인 삶과 미학적인 삶, 명상을 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금욕주의 철학인 스토아학파의 한 갈래를 이룬 에픽테토스의 철학은 세속적인 관심을 넘어서는 데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 기인한 모든 근원에서 여러 경험을 통해 살아가는 법을 일궈낼 것을 그는 주장했다.

 

"삶의 많은 것들이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지배할 수 있다. 바로 우리의 생각과 충동, 욕망, 혐오감, 즉 우리의 정신적, 감정적 삶이다."

 

물질세계에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유혹에 직면하는가. 바르지 못한 욕망의 비대화로 끊임없는 충동과 자기혐오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가 많다.

 

이것은 물질문명의 성장에 따르는 불가피한 논리가 마치 역설은 우리의 운명인가 하고 되묻게 만든다. 성급한 성취에만 집중하게 되는 오늘날의 현실은 미래를 암담하게끔 생각하게 한다. 그러면 어떡해야 하는가. 에픽테토스의 말은 무의식을 지배하라는 말로 들린다.

 

무의식, 이에 대한 논의는 수 없이 많지만 무의식을 어떻게 지배하라는 건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심층 의식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

 

'안다는 것'과 '앎'이 다르듯이 단순하게 안다는 인식이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아 일상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칼 융 박사는 무의식에 대해 현실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라 했는데 무의식을 길들이기 위해 마냥 로고스만을 내세워 억압과 금욕만이 절대 답일까.

 

에픽테토스는 얘기했다. "무언가를 잃어버렸을 때 그 자리에서 즉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가질 수 있었던 시간에 감사해라."면서, 물질세계의 만상은 내게 영원히 머무는 법이 없다. 잠시의 찰나가 있을 뿐이다. 지금의 기쁨은 내일의 아픔이 될 수도 있고 현재의 고통은 성찰로의 다음 단계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머무는 현상들을 하나하나 느끼면서 감사해하는 마음, 이것이 내 무의식을 관리하는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에픽테토스의 오랜 제안에 참으로 감사하다.

 

루소처럼 걷는 법

 

걷기를 중요시했던 철학자들은 많았다. 세상 모든 현자들을 만나기 위해 신전에서 잠을 자며 인도까지 맨발로 걸은 수학자 아폴로니오스부터 한적한 길을 걷는 것은 사색과 고요를 가져다주는 좋은 방법이라는 느림의 철학자 피에르 쌍소까지,

 

걸으면서 많은 사색을 했던 칸트를 보더라도 걷는 것은 분명 많은 이점을 주는 것은 분명하다. 발바닥 용천혈을 자극하여 대뇌 신경까지 활성화시켜 몸은 이완이 되면서 창의력 또한 높아진다고 한다. 만보 걷기를 하는 사람들이 건강한 이유이며 스트레스와 사념에서 자유로워져 심신에 활력을 준다.

 

루소는 말했다. "상상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역경을 만나면 자기 연민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그저 다시 시작하라. 결말 같은 건 없다. 무한한 시작의 사슬만이 있을 뿐"이라고.

 

철학자들의 산책은 창조의 행위이다. 걷는다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동작으로 "다음"이라는 가능태(可能態)의 공간을 계속 창출해 나간다. 막힌 길을 만난다면 다시 길을 찾으면서 가능의 공간은 무한해지기도 한다.

 

얼마든지 새로운 길이 있다. 일이 잘 풀리지 않고 고민할 일이 있으면 루소의 언급대로 걸어보면 어떨까. 루소는 '무한한 시작의 사슬'을 언급했다. 새로운 착안과 근시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걷는 것은 그 자체로 창조의 행위가 아닐까.

 

쇼펜하우어처럼 듣는법에서는 만물에 대한 관조(觀照)를 얻었다. 소음에서 벗어난 듣기, 듣기라는 또 다른 시선이라 할 수 있다. 이로서 사물을 더 또렷이 볼 수 있게 된다.

 

에픽테토스에게서는 내재한 의식에 대한 통제법을 사유해 본다. '나'라고 느끼는 몸은 늘 나를 지배하려고 달려들기에, 무의식을 조종할 수 있다면 욕망과 충동, 이로 인한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루소처럼 천천히 걸으면서 사유한다면 더 없는 자유에의 길로 들어섰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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