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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5-11 13: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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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미 시인

[안영미의 봉당에 앉아서] 유년기 최초 기억의 나는 울고 있었다.

 

팔에 냄새나는 무엇인가를 칭칭 두른 채였다. 나중에 그것이 술지게미였다는 것을 알았다. 약이 귀하던 시절의 민간요법이었다. 내가 들은 바로는 서울에서 막 내려왔을 무렵이란다. 뒷골목으로 아장아장 걸어가다가 넘어져 팔을 삐었다고 했다.


나는 지금도 아파서 울었는지 팔에 이상한 것을 칭칭 동여맨 것이 싫어서 울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 내용보다 장면이 각인 되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그런 느낌이다. 나의 경험이 아닌 양 영화의 장면처럼 남아있다.

 

지금은 이승을 떠난 노모는 잊을 만하면 그 이야기를 꺼내곤 했다. 지나간 이야기라 별생각이 없다가 울던 그 아이에게 한없이 연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있는 내용은 없다.


기억을 상상력으로 소환하면 세 살배기의 아이가 될 수 있다. 아이는 낯선 장소와 낯선 사람들 속에 던져진 거다. 그 아이는 뒷골목으로 아장아장 왜 걸어갔을까? 생각해 보면 아이가 울었던 것은 팔이 아파서도 아니고 술지게미를 동여매서도 아닐지 모른다. 이래도 울고 저래도 울었을 것이다. 몇 날 며칠을 울었을 것이다.


유년의 두 번째 기억은 대청마루에서의 기억이다. 그 기억은 깔깔깔 배꼽이 빠지게 웃고 있던 기억이다. 이때는 꽤 자라 영화의 장면처럼 객관화된 기억이 아니고 나라는 주관이 있는 기억이다. 전혀 흐릿하지 않다. 조금 과장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젊은 노모는 빨래를 밟고 있었다. 날씨는 춥지도 덥지도 않았다. 아이는 원피스를 입고 있었고 빨래 밟는 노모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노모는 놀이기구인 뺑뺑이가 되어 아이를 태워주고 있었다. 붕 띄우기도 했다가 살짝 내리기를 반복했고 아이는 고개를 젖히고 숨이 넘어갈 듯 웃었다. 그만할라치면 아이는 ‘또’라는 소리를 외쳤다. 그 기억에 빠지면 지금도 목이 칼칼하다. 막 웃음을 그친 것처럼.

 

아이에 대한 연민이 있을 까닭이 없었던 것을 상기하는 기억이다. 낯설어하는 아이를 끝내 웃게 했던 큰엄마로 일컫는 나의 엄마! 내 글에서의 노모가 바로 나의 수호천사로 남아있는 큰엄마이다. 나는 그녀의 품에서 옛날이야기를 들었고 자장가를 들었다. 품에서 났던 냄새는 아직도 내 코끝에서 떠나지 않는다.


앞에서 딱히 언제부터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지만 내가 어미가 된 후에 연민은 점점 싹이 트고 싹에서 끝이 나지 않고 성장하고 열매를 맺을 지경이다. 내 아이에게 우주는 어미인 나였다. 어미만 있으면 방긋방긋 웃었다. 어쩌자고 이런 아이를…

 

시간이 갈수록 이해하기 힘들었다. 누군가는 어미가 되어야 어미의 마음을 안다고 하지만 오히려 어미가 되었을 때 아이의 마음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 오죽하면 자식을 키우지 못했을까마는 당사자인 나로서는 너그러움이 일지 않는다. 무책임이라는 말로 일축한다.

 

생부보다 나는 십 년을 더 살았다. 생모는 생전에 있으나 한 뱃속에서 나온 동생들이 자식 노릇을 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나는 족하고 있다. 나는 절절한 엄마를 갖지 못했다. 내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까? 내가 어미가 되고 난 후, 오월만 되면 소환되는 숙제다.



[덧붙이는 글]
작가 안영미 시인은 안성에서 나고 자랐다. 고향을 떠났다가 중년이 되어 돌아왔다. 세 아이를 키웠고 지금은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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