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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7-05 06:51:56
  • 수정 2022-07-07 10: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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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미 시인

[안영미의 봉당에 앉아서] 비누가 손에서 미끄러진다. 이미 손에는 비누 끼가 묻어있는 탓이기도 하다. 다시 잡아 보지만 또 미끄러진다.


무를 대로 무른 비누가 장마철임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약이 오른 나는 빨래판에 놓인 걸레로 비누를 뭉개다시피 잡는다. 장마철의 어제는 내 손에서 미끄러지는 비누처럼 빠져나갔다. 무른 오늘도 미끄러지고 있다.


새벽에 잠이 깼다. 날이 새려면 아직 먼 시간이다. 카톡에 빨간 동그라미를 쓰고 숫자가 박혀있다. 누군가의 카톡이 와 있는 것이다. 청춘이 아닌 나이의 한밤 카톡은 반갑지 않다.


터치를 해보니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병원 응급실에서 결제한 카드사용 명세다. 두근두근혈액이 심장으로 조심조심 고이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막내딸이 이른바, 엄카(엄마 카드)를 사용하고 있다.


대면 강의를 시작한다고 서울에 거처를 마련하고 나가 있는데 한밤중에 무슨 연유로 응급실행을 했다는 말인가. 온몸으로 장마를 말하는 비누처럼 나의 의식은 누구의 손에 의해서 반죽이 되는지 질척거렸다.


읽지 않은 다른 카톡이 있다는 생각을 잊은 채 아! 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미끄러지는 의식 중에 무른 것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뺀질거리는 하나의 다른 의식이 있었다. 읽지 않은 카톡을 읽으라는 주문을 했다.


카드 내역 보고 놀랄까 봐 카톡 남겨놔요.’


칼에 살이 베이어 응급실에 갔다가 왔단다. 여섯 바늘 꿰매고 금방 집에 왔으니 걱정하지 말란다. 그리고 응급처치 후 사진을 올려놓았다. 약지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그런데 나의 의문은 해소되지 않았다.


오른손잡이인 막내가 칼에 다친 손은 오른손이다. 칼을 쓰다가 다쳤다면 왼손을 다쳐야지 왜 오른손을 다쳤을까. 궁금증이 해소되기는커녕 더 커졌다. 만약 잠이 들었다면 깨울 수는 없고 카톡을 남겼다.


살점이 잘려나갈 정도로 베었다고? 뭘 어떻게 했길래? 그리고 어떻게 오른손을 그렇게 벨 수가 있어?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곧바로 막내에게 전화가 왔다.


설거지하다가 그랬어요. 새로 산 칼인데 플라스틱처럼 생긴 게 그렇게 잘 드는지 모르고 닦다가베었나보다 했는데 밴드를 붙여도 소용이 없어서은현이가 응급실 가자고 해서 치료하고 왔어요. 괜찮아요.”


그제야 상황은 이해가 갔지만, 막내의 칼을 닦는 법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 칼날이 손으로 향하게 해서 닦으면 어떻게 해? 무딘 쪽이 손으로 향하게 해야지. 이런 건 알려줘야 아는 게 아니잖아? 아무리 경험이 중요하다지만 어떻게 이런 것도 경험이 있어야 아느냐고 이것아! 본능적으로 또는 간접경험으로도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것 아니야? 어서 잠이나 자.”


하기야 서른이 훨씬 넘은 젊은이가 과일을 깎지 못하는 경우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런 젊은이가 한둘이 아니란다. 나는 내 아이들에게 무엇을 못 하는 것은 자랑이 아니라고 일러주면서 키웠다.


자랄 때는 소근육 발달은 물론이고 두뇌활동에 도움이 되는 것은 체계적인 교육도 중요하지만, 생활에서 만나는 제반 활동이 모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무엇이든지 못하면 네가 살아가기가 불편하다고 스스로 하게 내버려 뒀다. 과일을 깎지 못하는 젊은이에 비하면 내 아이들은 야생으로 자랐구나 싶었는데 이런 사달이 났다.


내 아이들은 과일 깎아 먹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나는 자랑스럽게 나의 막냇동생과 통화한 적이 있다. 아마 그날일 것이다. 서른이 넘은 젊은이가 과일을 깎지 못하는 것을 발견한 날 말이다. 막냇동생은 중2 아들을 두고 있다.


언니! 우리 집에는 과일을 못 깎는 쉰 살도 있어, 신혼일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자기 딴에는 나한테 자상한 남편이 되고 싶어서 과일을 깎아준다며 깎았겠지, 자해하는 줄 알았어, 뭔지 알지?”


나는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서른이 넘은 그 젊은 친구가 그랬었다. 왼손에 과일을 잡고 칼 잡은 오른손 엄지는 과일에 대고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조절을 하는 기법이 해보지 않으면 어려운 게다. 오른손 엄지를 과일에 대고 조절하는 기법이 안되니까 그대로 칼을 움켜쥐고 과일을 깎는 것이다. 보는 사람은 왼손 엄지를 다칠 것 같아 조마조마한 상황이 연출된다. 차마 제 손은 다치지 않더라고 껍질로 깎여나가는 것이 반이다.


장마철의 하루는 불어터진 비누처럼 미끄러진다고 생각했는데 서투른 칼질에 벗겨진 참외껍질처럼 떨어진다. 뭉턱뭉턱 하루가 지나간다.



[덧붙이는 글]
작가 안영미 시인은 안성에서 나고 자랐다. 고향을 떠났다가 중년이 되어 돌아왔다. 세 아이를 키웠고 지금은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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