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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2-09-05 09: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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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영미 시인

[안영미의 봉당에 앉아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가건물을 낀 숲이다. 얼마 전까지 밤송이가 주인공이었는데 호박넝쿨이었다가 오늘은 매달린 호박이 주인공이다.

 

밤송이는 진한 초록색에서 옅어지는 것을 보니 곧 아람 불겠다. 추석까지 며칠 남았으니 몇 송이만이라도 툭 터졌으면 좋겠다. 호박넝쿨은 여름 땡볕이 약인가, 넝쿨 주인인 뒷집, 가건물을 넘더니 우리 집 울타리를 넘어올 기세다. 각각 다른 넝쿨에 호박이 두 개 매달렸다. 씨족사회 형제 같다.

 

독사 대가리처럼 바짝 치켜세운 넝쿨 순의 행진이었다. 하필 지붕을 타고 너머 아래로 내려온 부분에 열매를 맺었다. 달렸다고 말하기보다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은 커지는데 그에 반해 넝쿨의 굵기는 그대로다. 내게는 넝쿨이 만난 복병처럼 보인다. 잘 자랄 수 있을까. 따고 싶다.

 

넝쿨이 영역을 넓힐 때부터 나는 엿보고 있었다. 호박아, 울타리 넘어와 달리기만 해라. 그건 내 것일 테니. 요런 심사가 아니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열심히 살아내는 인간사와 다를 게 없구나. 호박 힘내라! 호박에게 지른 듯, 벋어가는 호박넝쿨을 보고 내게 지른 구호다.

 

따고 싶지만 나는 따지 않을 거다. 내가 심지 않았으니 주인이 아니어서가 아니다. 그깟 호박쯤 따먹었다고 뭐라 할 이웃도 아니다. 우리 호박 넝쿨에서 따온 호박도 차고 넘친다. 내가 궁금한 것은 저 씨족사회 형제가 어떻게 난관을 극복하는지 궁금하다. 맷돌 호박이니 맷돌만큼 커질까. 위험하다! 여기서 그만! 감지하고 속의 씨앗만 잘 영그는 것은 아닐까.

 

처서가 지나면 밤바람이 시원하다. 뜨거운 햇볕 아래서는 느긋하던 가지와 호박이 부지런히 열매를 맺느라 바쁘다. ? 뭐지? 시간이 없네. 부지런히 번식에 열을 올리는 것이다. 요즘 나는 먹을새 없이 달리는 가지와 호박을 따느라 바쁘다.

 

식물의 본능에 내가 왜 감성주의자가 되는가. 내 인생을 통틀어 지금 찬바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더, 건강한 두 다리로 후다닥거릴 것이며, 얼마나 더, 긴 시간 의자에 앉아 글을 쓰고 글을 읽을 것이며, 얼마나 더, 낭랑한 소리로 잘 났다고 질러댈 것이며, 얼마나 더, 좋은 사람들과 술 한 잔 마시자는 제의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태풍이 온다기에 하루를 공글린다. 급하게 애벌 턴 참깨를 다시 털어 끝내고, 사놓은 채 일주일 묵힌 배추 모종을 심었다. 호박 넝쿨을 이리저리 살펴보니 맷돌보다 더 크게 늙은 호박이 세 통이나 있다. 일찌감치 달려 늙어서인지 몸체가 커질 대로 커졌다. 잘도 숨어 있었다. 더 비 맞기 전에 땄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씨족사회 형제의 현실이 곧 나라며 발버둥 친다면 성찰의 오류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허공을 헤맬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여기가 허공인 것을 알면 답은 나온다.

 

태풍 지나가면 가을 햇살 아래 찬바람 맞은 가지와 호박을 납작납작 썰어 말려야겠다.



[덧붙이는 글]
작가 안영미 시인은 안성에서 나고 자랐다. 고향을 떠났다가 중년이 되어 돌아왔다. 세 아이를 키웠고 지금은 자유기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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