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미의 봉당에 앉아서] 칠장사 일주문을 지나자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소슬한 바람이 보인다. 허공에 노랑 바람을 그린이 누구인가.
붓은 보이지 않고, 붓을 잡은 주체는 더욱 보이지 않는다. 빈 마음일 때 그림이 보인다. 아니다. 그림을 본 순간 마음에는 아무것도 없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말하는 찰나의 인생처럼 허공에 순간 그림이 머문다.
안개를 거둔 아침나절의 산사는 청명하고 고즈넉하다. 칠현산 자락과 칠장사의 단풍, 가을꽃과 마른 잎 또한 어우러졌다. 가을이 깊고 깊다. 인목대비가 영창대군을 잃고 천도재를 지낸 절이다. 그때 그 사연을 간직한 탱화가 보관되어 있다. 사료로 국보로 지정된 오불회괘불탱(국보 296호)이다.
국보가 있는 절이래.
국보가 대수인가.
하지만 오늘따라 평범한 어미였을 인목대비를 불러온다.
왕비는 왜 했데. 광해군 나빠.
꺽꺽 올라오는 목울대를 누르다 한 번쯤은 피를 토하는 울음을 울었으리라. 피를 찍어 사경을 한 금강명최승왕경 또한 절에 보관되어 있다. 어린 아들이 증살(蒸殺) 당한 어미의 마음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자식이 압사당한 부모의 마음은 무엇으로도 위로할 수 없다. 대웅전 왼쪽에 있는 가람 마루에 앉아 무던히 절 마당만 본다. 느티나무 잎이 후드득 떨어진다. 낙엽이 지고 꽃도 지고 노을이 지듯 사람도 진다. 꽃봉오리가 진다고 할 수 없고 피지 못한 청춘들도 지는 것이 아니다.
황망한 죽음 앞에 말문이 막힌다. 내게는 스물여섯 아들이 있다. 세월호 아이들 동기다. 벚꽃이 지던 그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낙엽이 지는 이 계절, 슬픔 또한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 어려운 논리를 내가 왜 알아야 해? 하다가도 이게 이렇게 되는구나, 하고 알게 되는 순간 희열을 느끼게 돼. 먹고 사는 데 만고 필요 없는 것 같은 공부를 그래서 한다니까.”
중간고사 끝낸 대학 3학년 막내가 와서 내게 한 말이다. 시험 끝나고 친구들과 속초여행을 끝내던 날 밤에 또래들에게 악몽 같은 일이 이태원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들도 중간고사를 봤을 거고 잠시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거다.
절 마당을 공허하게 바라보는데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세상은 좋지 않은 세상이다. 무슨 세상이 살아있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단 말인가. 사회적인 우울에서 잘 벗어나야 하는데 참으로 걱정이다.
바삭바삭한 풀숲을 잠시 들어가 보았다. 거기에도 꽃은 피어있다. 마른 풀 속에 피어있는 꽃이 담채화 같다. 담담하게 소신껏 살아 피는 꽃이 깊이를 더하는 것 같아 눈길을 끈다. 담담하게 마음을 적어보는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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