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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내는 도의원! 외조는 천만의 말씀입니다” - 22년차 부부 보라씨와 병찬씨의 좌충우돌 맞벌이역사.
  • 기사등록 2018-02-01 20: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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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의회 김보라 의원의 부군인 최병찬씨가 그의 아내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들(아내 김보라-50세, 남편 최병찬-50세)을 안성 자택에서 만났다. 처음 본 이집 거실은 편안했다. 손님이 온다고 하면 칼같이 치우는 여느 집과 달리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집이었다. 범상치 않은 이 편안함은 뭐지 싶었다. 편안해도 ‘너무’ 편안했다. 이 분위가 우리를 ‘수다삼매경’으로 인도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하하하하.


30년 전, 안성에 첨 오게 된 이유부터 범상치 않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부부가 적어도 ‘돈 버는 남자, 집안일 하는 여자’ 쯤은 아니어도, ‘평생 바깥일하는 아내, 외조 하는 남편’ 쯤은 되는 줄 알았다. 이 생각은 조금 멀리서 바라보는 안성사람들은 누구나(?)하고 있는 생각이었다.


보라씨는 현재 더불어민주당 경기도의원(2014년부터)이고, 직전엔 20년 넘게 ‘안성의료생협’창립 멤버로서 실무자를 해오던 터였다. 물론 병찬씨도 평생 맞벌이를 했지만, 안성지역에선 왠지 보라씨만 바깥일을 하고 살아온 것처럼 보인 것은 기분 탓일까. 하하하하.


두 사람이 안성을 오게 된 사연부터 범상치 않았다. 병찬씨는 S대 출신, 보라씨는 Y대 출신이다. 잘 나가는 대학 출신의 선남선녀들이 왜 30년 전에 농촌도시 안성 땅을 밟았을까. 그랬다. 학창시절, 88년도에 병찬씨는 농활 하러, 89년도에 보라씨는 의료봉사 하러, 처음 안성에 왔었다. 아직 이들에겐 만남의 연은 없었다.


그 후 93년도에 병찬씨는 안성고삼 농협의 선배의 부탁으로 농협 일을 하기 위해서, 보라씨는 안성농민의원(안성의료생협의 초창기)의 창립을 위해, 각자 안성 땅을 다시 밟았다. 병찬씨는 농민을 돕는 일로, 보라씨는 간호사로서 주민을 돕는 일로 안성에 다시 오게 되었다.


▲ 최병찬,김보라 부부의 좌충우돌 연애사와 결혼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김보라의원이 이야기 하고 있다.


결혼이유? 아내가 결혼하자고 해서?


이들의 안성자립을 위해 반겨준 안성사람들은, 대부분 두 사람보다 10년 이상 나이가 많았다. 이런 모임에서 막내는 거의 두 사람이었다. 동갑내기 두 사람은 25살 청춘이었다. 선배들은 짓궂게 “그럼 보라랑 병찬이랑 결혼하면 되겠네”라고 놀렸고, 그것이 덜컥 현실이 되고 말았다. 설마, 그 말했다고 결혼 했겠냐마는, 말이 씨가 된 건 사실이었다.


그 후 28살이 되던 해, 결혼을 했다. 두 사람에겐 근사한 프러포즈는 없었다. 외로운 타향살이 아니었던가. 보라씨는 “일단은 외로웠고, 혼자보다 편할 거 같아서 결혼을 결심했다”고 했다. 결혼하려고 주위를 돌아보니, 그래도 자신을 잘 이해해줄 거 같은 남자가 병찬씨였다고 했다. 보라씨 본인 말로는 “그때 내가 ‘신부 깜’으로 인기가 좀 있었다”고 하는데, 글쎄 증명할 방법이~~~ 하하하하.


그럼 병찬씨는? 대답이 간단했다. “보라씨가 결혼하자고 해서 했다”. 헉! 이 남자 뭐지. 여느 남녀와 뒤바뀐 것 같은 분위기는 둘째 치고, 결혼이 아이들 장난도 아닌데, 여자가 하자고 한다고 해? 그런 게 어디 있지 싶었다. 하지만, 분명히 여기 있었다. 보라씨의 카리스마에 병찬씨가 끌렸던 건 사실이었다. 

 

물론 이야기를 하다 보니 병찬씨가 고백했다. 보라씨는 3가지가 매력이 있었다고. 첫째는 똑똑했고, 둘째는 생활력이 강했고, 셋째는 웃는 모습이 예뻤다고. 웃는 모습이 예뻤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보라씨는 이미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이 묘한 분위기를 어쩌지 싶었다. 더군다나 신혼 땐, 병찬씨가 계속 보라씨의 팔을 베고 잠을 잤단다. 헉! 뭐.....뭐지. 우리가 생각한 그림이 아니었다. 하하하하.


지금도 안성사람들은 “보라씨의 급한 성질을 병찬씨니까 받아주지, 누가 받아 주고 살겠어”라 하고, 병찬씨의 친구들은 “어딜 내 놓아도 불안한 병찬씨가 보라씨를 만나 사람답게 사는 거”라고 했다. 뭐가 진실일까. 부부가 공히 인정하는 바대로 후자였다. 이로써 안성사람들에게 진실의 문은 활짝 열렸다.


“집안일은 시간 되는 사람이 먼저 한다”


평생 맞벌이부부이면서도, 이 가정이 잘 살아온 원칙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간단했다. “집안일은 시간 되는 사람이 먼저 한다”는 것. 여기에 남녀의 구분은 애당초 이집에 자리 잡을 틈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땐, 두 사람은 ‘가정교대근무’를 했다. 무슨 말이냐고? 맞벌이를 해도 서로 격일제로 집에 일찍 들어와서,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기로 합의했다. 회사 스케줄도 ‘가정교대근무’를 기본으로 잡았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약속을 어기면, 한 사람의 회사스케줄이 엉망이 되니까, 웬만하면 어기기 힘들었다. 오죽하면 딸이 어릴 때 “우리가족은 왜 같이 모이는 날이 없죠.”라고 했단다.


“그렇다고 남편이 알아서 살림을 잘 하는 건 아니랍니다. 남자들은 3부류인데, ‘1번은 시켜도 안하는 사람, 2번은 시키면 하는 사람, 3번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하는 사람’입니다. 남편은 ‘2번의 사람’이었다가 최근에 3번으로 진화해가는 중이랍니다. 호호호호.”


병찬씨도 인정한다고 했다(그런데 이 남자, 인정 하나는 정말 끝내준다). ‘평생 바깥일하는 아내, 외조 하는 남편’이란 헛소문은 이제 안드로메다로 완전히 날려 보낼 시간이 된 거다. ‘평생 바깥일 하는 부부, 상부상조하는 부부’, 이것이 바로 진실이었다.


▲ 최병찬씨는 아내 김보라의원이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는 동안 애틋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 스타일,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신혼시절, 병찬씨가 지인의 집들이를 가서 놀다가, 새벽에 귀가해서 오니, 집 앞에 저승사자 같은 여성이 떡하니 버티고 서있었단다. 바로 보라씨였다. 그때를 떠올리던 병찬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때의 아내의 서슬 퍼런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병찬씨는 그때를 추억했다. 하루 종일 혼자 육아를 하는, 아내와 한 약속(조기 귀가)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반면, 자신들의 집들이에 지인들이 초대되었을 때, 더 놀다가 늦게 가라고 해도, 지인들은 보라씨의 눈치를 보며, 2차를 바깥에서 했다. 이유는? 평소 동료들이랑 술잔을 부딪치던 보라씨. 항상 사무실에서 일만하던 보라씨를 보아오던 동료들은, 보라씨가 앞치마를 하고 옆에 다가와서, “뭐 부족한 거 없냐? 뭘 더 드릴까?”라고 물어오면, 그게 그렇게 어색하고 불편했던 모양이라고 했다. “여기서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라는 분위기 있잖은가.


“남편이 언제 고마웠느냐”고 묻자 보라씨는 큰 아이가 어릴 때라고 했다. 바깥일을 하고 늦게 귀가 했다가, 우연히 병찬씨가 아이를 재우면서 하는 자장가를 엿들었다. “엄마는 사회를 위해 좋은 일 하는 분이라서 늦게 오시는 거야. 우리 아기 잘 자라”고 하는 말이었다. 덕분에 아이들은 엄마가 늦게 오더라도 항상 “우리 엄마는 사회를 위해 좋은 일하다가 늦게 오는 것”이라고 인식하며 자랐단다.


“내 아내는 알라딘 램프에요. 문지르기만 하면 마법처럼 척척해줘요”라는 병찬씨. 병찬씨가 “시골 가서 흙 밟으며 살고 싶다”고 하면, 그 다음날 보라씨는 바로 시골집을 알아봐서 이사를 갔고, “아파트는 낮은 층에 살고 싶다”고 하면 보라씨는 그 다음날 바로 거기로 이사를 가곤 했단다.


큰아이가 5세, 작은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남편이 갑자기 직장을 그만두고, “곧 태어날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겠다”며, “성실히 돈을 더 벌겠다”가 아니라, 대책 없이 국악과에 편입해 공부하고자 할 때도, 보라씨는 시원하게 “당신이 원하면 오케이”라 했다고.

▲ 김보라의원의 휴대폰 속 가족사진은 그녀가 힘들때 꺼내보게 되는 큰 버팀목이다.

한번은 병찬씨가 “여보 이 문제 때문에 고민 되네. 어떡하면 좋지요”라고 하니, 보라씨는 “뭘 그리 고민해요. 딱 봐도 그걸로 하면 되겠구만”이라고 하더란다. 병찬씨는 “당신은 참. 누가 답을 몰라서 그러나. 그냥 당신한테 위로받고 싶어서 그랬지요”라고 대답했다. 확실히 바....바...바뀌었다. 내 생각만 그런 건 아니겠지.


아! 원동력은 ‘포기와 존중’의 철학이었다.


병찬씨는 안전하게 세팅이 되어야 일을 시작하고, 보라씨는 일단 일을 시작해놓고 해가면서 생각하는, 달라도 너무 다른 이 두 사람의 맞벌이역사가 평탄했던, 진짜 원동력이 무언지 궁금해졌다.


일단 두 사람은 모두다 상대방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기념일이나 생일 등을 챙겨주지 않아도 서로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았다. 22년차 동갑내기 이 부부는 지금도 서로에게 존댓말을 한다고 했다. 이 부부의 비결은 ‘포기와 존중의 철학’을 평소 실천하는 데 있었다. 덕분에 아빠보다 더 살림 잘하는 19살 아들과, 엄마보다 더 야무진 22살 딸로, 자녀들이 잘 자라줬다.






(우리타임즈에서는 누구나 기자가 될 수있습니다. 우리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보내주시면 소중히 검토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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