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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5-11-02 10:3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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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는가? 매년 11월 1일은 ‘시(詩)의 날’이라는 것을.


1908년 육당 최남선이 우리나라 최초의 신시 ‘해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한 날을 기념일로 정했는데. 달력에 수두룩 빽빽한 무슨 날 무슨 기념일이 있지만 달력에도 표기되지 않는 시인의 날도 아닌 시의 날에 시인이 무슨 격한 칭찬을 받거나 위로받을 일은 전혀 없다. 

 

금년에도 11월 2일 제29회 시의 날을 맞아 서울시에서는 중구 문학의 집 서울에서 오세영 신달자 등 여러 원로 시인들이 참여하는 '시민과 함께하는 시(詩)의 날' 행사를 개최한단다.


물론 시의 날을 빌미삼아 시낭송을 들려주는 등의 행사를 통해 시와 시인, 시와 독자의 소통 통로를 넓혀가기 위한 어떠한 구체적인 장이 마련되는 것은 삼류시인 측에도 끼지 못하는 나로서는 어렴풋이 바람직한 일로 여기고 있을 뿐, 애당초 시와 시인은 세상의 주류이거나 조명을 받는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물질 만능 사회에서 시와 시인의 ‘별 볼일 없음’은 어쩌면 당연한 노릇일지 모른다.


지금 들판에서는 추수가 한창이다. 추수 후의 황량한 논밭에는-지금이야 보기 힘들겠지만 -텃새 같은 노인들의 이삭줍기가 낡은 연민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그와 닮은 시인은 언제나 음지 같은 늙은 우수를 주워들고 투사처럼 하늘을 노려보며 창작의 빈약함에 목말라했다.


하지만 2만 명도 넘는 시인 가운데 후하게 잡아 90%는 마이너리그에도 들지 못하는 흑싸리 껍데기 등외품 시인이다. 물론 나도 그 중 하나이리라. 이를테면 독자로 남아야 마땅할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분명 세상을 되짚어 시인본색은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지난날 시인은 한 시대와 사회의 지식인이며 선각자였으며 진실을 증언하는 대변자였다. 얼마나 온 몸으로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였던가. 그러자면 현실을 보는 정확하고 균형 잡힌 시각과 뚜렷한 신념, 가치관과 세계관이 갖춰져야 함은 물론이다.


시인 선서/ 김종해


시인이여.

절실하지 않고, 원하지 않거든 쓰지 말라.

목마르지 않고, 주리지 않으면 구하지 말라.

스스로 안에서 차오르지 않고 넘치지 않으면 쓰지 말라.

물 흐르듯 바람 불듯 하늘의 뜻과 땅의 뜻을 좇아가라.

가지지 않고 있지도 않은 것을 다듬지 말라.

세상의 어느 곳에서 그대 시를 주문하더라도

그대의 절실함과 내통하지 않으면 응하지 말라.

그 주문에 의하여 시인이 시를 쓰고 시 배달을 한들

그것은 이미 곧 썩을 지푸라기 시詩이며, 거짓말 시詩가 아니냐.

시인이여, 시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그대의 심연을 거치고

그대의 혼에 인각된 말씀이거늘, 치열한 장인의식 없이는 쓰지 말라.

시인이여, 시여,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

온 세상이 권력의 전횡專橫에 눌려 핍박 받을지라도

그대의 칼날 같은 저항과 충언을 숨기지 말라.

민주와 자유가 억압당하고, 한 시대와 사회가 말문을 잃어버릴지라도

시인이여, 그대는 어둠을 거쳐서 한 시대의 새벽이 다시 오는 진리를 깨우치게 하라.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


<시집『바람부는 날은 지하철을 타고』(문학세계사, 1990)>


김종해 시인이 200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으로 있을 당시 '시의 날'에 발표했던 치열한 시인정신과 장인의식 없이 겉멋만으로 시를 쓰지 말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시인선서’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대는 이 지상을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위안하고 보다 높은 쪽으로 솟구치게 하는 가장 정직한 노래여야 한다.’라며 시인이 지녀야 할 역사인식과 고결한 시대적 사명감을 주문하고 있다.


대구에서 활약 중인 권순진 시인의 칼럼을 재 전개해 나가다가 이쯤 되면 ‘그대는 외로운 이, 가난한 이, 그늘진 이, 핍박받는 이, / 영원 쪽에 서서 일하는 이의 맹우盟友여야 한다.’고 토로하는 시인들이 있다면 시의 날이 있는 것도 별로 나쁘진 않겠다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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