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미의 봉당에 앉아서] 글을 쓸 때 첫 문장 쓰면 조금 과장해 반은 쓴 거다. 얼마 전부터 글 한 편을 쓰려는데 첫 문장은 물론 도입부 글이 나오기 전에 중간 부분의 글들만 자꾸 머리에서 요동을 친다.
‘그래서 그 이야기 전에 뭔가 판을 깔아야 하잖아’ 하는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하루가 지나면 달라지고, 또 달라지는 하루가 온다.
땅콩 이야기를 하려는데 2주 지났고 묵을 쑨 이야기를 하려니 닷새가 지났다. 나박김치 이야기는 묵을 쑨, 같은 날 나박김치를 담았다. 조밀하지 않은 글을 쓰려니 자꾸 딴짓만 일삼았다.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다. 이야기를 열거하다 보니 문제가 보인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것이다. 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까.
설날을 며칠 앞두고 있으니 코밑으로 지나는 이야기가 있고 저 마당이라는 무대에 이야기가 드라이아이스처럼 퍼지고 고드름 끝에서 오후 세 시의 이야기가 똑똑 떨어지는 처마 끝이 보인다. 무쇠 솥뚜껑에 돼지기름을 바르고 녹두전을 부칠 것도 아닌데, 물을 데우던 큰솥에 엿을 고울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리움이라는 감성으로 설명하기에도 딱 떨어지지 않는다.
지금의 날들의 기운이 나와 잘 맞지 않는 것처럼 안정감이 없고 수선 맞다. 명절, 제사의 달인이라고 할 정도로 세월을 보냈으니 부담이 있는 것은 아니다. 뭐라고 할 어른이 계신 것도 아니고 손님도 단출하다.
살다 보면 계획 한 일이 아닌데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내 나이가 이제 청춘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인 순간이 있다. 그때 깊게 생각한 것이 ‘가벼워지자’라는 마음이었다. 예기치 않게 하게 된 일이 숨겨놓은 욕망을 들쑤신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아무리 타의에 의해서라고 한들 받아들인 것은 나이니 객관화된 또 다른 내가 저만치서 비웃고 있다.
내일은 설음식을 하고 내일모레는 차례를 지낸다. 떡국을 끓이고 산적과 생선을 굽고 나물을 무칠 것이다. 식혜와 약과와 유과도 준비했다. 이십 대에 만난 시부모님과의 인연을 기억하는데 두 딸과 아들이 우뚝 서 있다.
변기 물 내리는 것을 잊고 나오는 남편을 탓하다가 문득, 나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한 지가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설 명절을 앞두고 수선한 마을을 정돈하다가 보니 쏠리는 감성을 어쩌지 못한다.
옛사람들이 떠난 마을은 설이 더욱 쓸쓸하다. 어서 봄이 와, 긴 밤 울어대는 부엉이보다 이른 새벽 멀리 들려오는 산비둘기 소리가 기다려진다.
퇴근 후, 오늘 저녁에 나는 마트에서 사 온 조청을 졸여 들깨와 땅콩을 버무린 강정을 만들 것이다. 이렇게 설을 맞이하고 나는 조금 더 늙을 것이다. 가벼워지려는 마음은 실패할 것이다. 글의 도입부가 어려운 데는 다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