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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23-03-16 09: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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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사흘 동안 서북쪽으로 불고 있다

비스킷처럼 부서지는 햇빛의 분말

고요가 말줄임표를 찍으며 낮게 가라앉는다

 

권태는 시간이 나에게 가하는 복수

어둠에 핀을 꽂으며 다가오는

새와 물고기는 같은 종()이라고 말하는 너에게

나는 물고기가 되어 거실에서 베란다로 유영한다

 

보이저 1호가 보내온 사진*

 

숲으로 가는 길에 뿌린 빵가루가 까맣게 변색되고

유통기한을 지키려던 통조림이

진공으로 불룩해진 날짜를 들이민다

십 리터의 물을 마시려고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린 나를

 

믿고 싶지 않다

두 가지 기억이 이어지지 않아 더듬거리는 혀의 갈증

의미 없이 리듬만 타는 문장들

백 페이지의 악보가 티끌로 사라지는 날들의 후기

 

간식으로 챙겨 넣은 석류 즙을 종점에 와서 마시고

이어폰을 돌돌 말아 주머니에 넣으면

소리 내지 못한 두 눈이 모자이크 뒤에 숨는다

 

가끔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에서 보내오는

섬 한 채를 띄우고 길을 잃은 일행은 불을 밝힌다

꽃의 노래는 많으니 따가운 가시의 노래를 부르자고

새가 종잇장처럼 떨어지는 명왕성 사진의 뒷면

꽃의 역사는 쉬우니 어려운 뿌리로 얘기하자고

 

보이저 1호가 비가 온다고 말하면

창밖을 내다볼 것이다

눈물 한 방울 눈썹에 매달고 창문을 기웃거리는

푸른 나비들의 더듬이

 

죽은 사람도 바람결에 머리칼을 날리는 구름 아래

내가 소홀히 보낸 하루하루가 꽃잎으로 물들다가

흡묵지 아래서 순해진다

창백하게 파랗게 혹은 까맣게 

 

칼 세이건(Carl Sagan) Pale Blue Dot

 

 




 

지난 일에 대한 아쉬운 감정은 누구나 경험한다. 나름의 목표 달성을 위해 열심히 살아온 기억에는 스스로의 의도와 다르게 디스토피아(distopia)를 향했던 일이 부산물처럼 쌓여 있게 마련이다. 톨스토이는 "모든 생명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인생을 이해할 수 있다"라고 했다.

 

가이아적 관점에서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인식하며 멀리서 본다면 광활한 공간에서 푸른 점으로 희미할 뿐이다. 작고한 과학자인 칼 세이건이 책으로도 출간한 <</span>창백한 푸른점>은 보이저 1호가 태양계 외곽을 지나며 궤도 밖에서 사진 찍어 전송한 지구의 모습을 일컫는 표현이다. 더 멀리서 자신을 제 3자 혹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면 안타깝고 아쉬워했던 때의 심정과는 많이 다를 것이다. (박용진 시인/평론가)

 





 



한정원 시인

 



세종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교육학 석사) 졸업.

1998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그의 눈빛이 궁금하다(시와시학사, 2003)

낮잠 속의 롤러코스터(시평사, 2005), 

마마 아프리카(현대시학, 2015), 

석류가 터지는 소리를 기록했다(천년의시작, 2021)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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